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퇴위, 유배, 망명시도 ==== 러시아 제국은 제1차대전이 장기화되자 당시 알렉산드르 트레포프(Александр Трепов) 총리는 독일과 단독강화를 모색했다. 이 때 대독강경파인 알렉산드르 프로토포포프(Александр Протопопов) 내무부 장관은 이를 반대했다. 무엇보다 장관 및 총리에 대한 두마 정당들의 정치 비방 때문에[* 말이 정치적 비방이지 그냥 대놓고 장관들이 황후나 라스푸틴의 영향력으로 임명되고 해임되었다던가, 독일계 러시아인 인사들이 적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주장하면서, 전시 체제로의 전환을 막았다. 하다 못해 전선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두마 때문에 나라 망할 지경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내각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중 1916년 12월 라스푸틴은 암살되고, 정국은 혼란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민심이 악화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시민과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 퇴진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고, 2월 내내 페트로그라드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젊은 두마 의원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수도의 군중을 선동하여 내각의 장관들을 모두 체포하고 주요기관을 점거하도록 하여 혁명의 지도자로 급격히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노프 왕가의 중신들조차 결국 더이상 제정이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군부 대표인 니콜라이 루츠키 총참모장과 두마 의원 바실리 슐긴이 니콜라이 2세의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세계대전 도중 내분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이유로 3월 15일 퇴위에 동의했다. 이를 '''2월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구력([[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결과적으로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러시아 연방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물론 니콜라이 2세는 퇴위에 동의하긴 했지만, 두 번이나 제정을 연장하려 시도했다. 첫번째 방안은 자신은 퇴위하되 제위를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에게 넘기고 막내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섭정으로 지정해 제정을 연장하려 하였으나, 퇴위를 강권한 신하들이 이것은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부족하다고 상신하자 다시 아들 알렉세이 대신 막내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제위를 넘겨 어떻게든 로마노프 왕조의 명맥을 연장하려 했다. 하지만 황실에 대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는 것 정도로 돌아올 리가 없었고, 더해서 '어차피 로마노프 일가는 다 똑같은 놈들이다'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결국 미하일 대공마저 민의에 반한 제위 계승을 거부하고 제정 폐지 요구를 수락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그 막을 내렸다.[* 미하일 대공은 제정이 붕괴된 후 여러 경로로 망명이 가능했지만, 이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제정 부활을 두려워한 [[볼셰비키]]에게 암살된다.] 케렌스키가 수반으로 있는 임시정부는 차르를 보호한다고 약속했고, 니콜라이는 가족과 함께 [[우랄 산맥]] 근처의 가족과 함께 [[토볼스크]]에 연금되었다. 이런 유배는 사실 차르 일가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도시지역에서는 분노한 민중들이 차르 처단을 요구하며 언제든지 다시 봉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대중의 눈을 피해 차르를 오지로 옮긴 것이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러시아 공화국|임시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다. 니콜라이 2세의 이종 사촌 형이자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던 영국 국왕 [[조지 5세]]도 차르 일가를 모두 구하고 싶었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망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왕실 비서실장이었던 스탬퍼덤 남작 아서 빅(Arthur Bigge, 1st Baron Stamfordham)이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망명 수락에 제동을 걸었다.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감정이 굉장히 나빠지면서 영국 왕실에 대한 반감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노버 왕조]] 이래 영국 왕실은 독일계로 특히 왕실의 배우자들은 대체로 독일 또는 [[북유럽]] 출신이었다.[* 이는 다른 유럽 왕가들은 대체로 [[가톨릭]]계라서 [[개신교]]에 속하는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7세]]의 아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왕비]]와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도 원래 성은 독일계인 [[글뤽스부르크 왕조|글뤽스부르크]]이며, 이 왕가는 독일에서 발원해서 [[덴마크]] 및 [[북유럽]] 여러 곳을 다스렸다.] 당시 왕가의 성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독일인]])의 성씨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영어식 표기 색스코버그고타(Saxe-Coburg and Gotha)를 썼고[* 이후 영국 왕실은 독일어식 성을 버리고 윈저를 공식 가문명으로 삼는다.], 왕가 인사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에도 익숙했다. [[조지 5세]]의 왕비였던 [[테크의 메리]]도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독일인이었고, 자신도 독일어를 모어로 쓰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면 묘사된다.] 사람이었다. 스탬퍼덤 남작은 광범위한 정보 수집 끝에 "전쟁의 시발점[*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이 후견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하자 이를 자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 독일 제국이 러시아 및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프랑스]]에 모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이 된 러시아 황제 일가를 데려오는 것은 영국에서도 군주제 폐지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조지 5세]]는 망명 허가를 취소했다.[* 훗날 공개된 왕실 문서로 내각에서 내린 결정이 아닌 [[조지 5세]] 본인의 결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 조지 5세도 잘못하면 자신의 왕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는데, 특히 영국 왕실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여론에 상당히 민감하다. 결국 러시아 황제 일가는 총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때문에 조지 5세는 자신의 이모이자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이종사촌 여동생들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을 포함한 그나마 볼셰비키의 추적이 덜한 여성 황족들 상당수를 망명시켰다.(물론 남성 황족들은 자력으로 도망쳐야 했다) 또한 훗날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자 조지 5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일가를 영국 군함에 승선시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탈출한 앨리스의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은 조지 5세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되고, 필립 공도 소련에 가고 싶느냐는 질문에 이 사건을 언급하며 ‘가고야 싶지. 그 새끼들이 내 가족의 절반을 죽였어도 말이오.’고 답했다. 물론 황실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걸로 추정되는 자들은 인터뷰 시점에서 이미 병사했거나 날조된 혐의로 숙청당한 뒤였다.] 그리고 망명이 성사될 수 없었던 다른 이유는 그 니콜라이 2세 본인부터가 망명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2세는 자기 가족을 러시아의 어느 시골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실상 그쯤되면 본인의 의지는 중요한게 아니었다. 임시정부 수반인 케렌스키는 [[사형제]]까지 폐지하며 니콜라이 2세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형제를 폐지한다면 군법이 느슨해져 전선이 붕괴된다며 사형제 폐지에 반대했다.], 이는 오히려 민심의 악화만 불렀다. 게다가 야심차게 추진한 독일군에 대한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위기까지 접어들고, 국정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볼셰비키당 수장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부르주아 혁명을 기다리기보다는 노동자가 직접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임시정부가 힘을 잃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던 [[볼셰비키]] 당은 휘하 병력으로 제정과 마찬가지로 민심이 떠난 케렌스키 정부를 10월 25일(그레고리력 11월 7일) 무혈로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10월 혁명이라고 한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군부도 등을 돌렸기 때문에, 겨우 여군으로 이뤄진 1개 대대만을 보유했고, 이들은 볼셰비키 휘하 적위대에 저항 없이 항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